새롭게 변화된 강동그린나래센터, 변화의 포인트
저는 요새 우리 공간이 새롭게 단장하고 새 출발 하게 된 지 얼마 안 되다 보니 여러 가지로 분주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번에 우리 센터를 운영하는 법인이 한국자폐인사랑협회로 바뀌고, 공간도 리모델링하게 되면서 이름도 ‘강동그린나래복지센터’로 바뀌고 여러모로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보호작업장에서 근로하는 직원들의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해 근로 조건도 변화되었고, 별별 체육관을 비롯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실무적인 거야 우리 직원들이 다 진행하시지만, 전반적인 걸 머리에 다 담고 있으려니 머리가 분주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사실 보호작업장에서 이런 변화를 만들어 내는 건 정말 쉬운 일은 아니에요. 일반적인 보호작업장 상황은 정말 어렵거든요. 아무래도 이윤이 많이 나는 사업을 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보니 직원들 급여를 주는 것만 해도 빠듯해서 매출에 급급할 수밖에 없어요. 서울에는 보호작업장이 120개 가까이 되는데, 아무래도 지방 보다 뻗어 나갈 공간적 여유가 없는 편이어서 대체로 가내수공업의 임가공업이고 수익이 낮은 편이에요. 그래서 매출 맞추려고 선생님들이 잔업을 하기도 해요. 그러다 보니 규정상으로는 보호작업장에서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하지만 매출을 우선 맞춰내야 하니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한계가 많아요.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보건복지부에 장애인들 다 최저임금 주라고 제소했고, 정부에서도 근로 장애인의 근로 조건을 보장하라는 방향으로 압박하고 있어요. 기업에서 장애인을 고용하면 그만큼의 고용장려금을 정부에서 주기도 해요. 문제는 그게 보호작업장으로 바로 오는 것이 아니라 다 운영하는 법인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거예요. 안타깝게도 그걸 지원받지 못하는 시설들이 많아요. 50% 주면 정말 많이 주는 거라고 얘기할 정도죠. 이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고 계속 건의를 하고 있어요.
다행히 저희는 이번에 협회가 바뀌면서 100% 받게 되었는데, 이전에는 하나도 받지 못해서 정말 빡빡했어요. 직원들 간식 같은 것도 겨우 사주고 여유가 없었죠. 그런데 협회가 바뀌면서 법인전입금, 고용장려금을 받으면서 약간의 여유가 생기게 된 거예요. 그래서 조금씩 직원 급여도 올려주고, 새로운 프로그램도 시도해볼 여력이 생긴 거죠. 저희 공간에 별별 체육관도 들어오고 그랬으니 이제는 일과 프로그램 시간을 완전히 분리해서 안정적으로 운영하려고 해요. 좀 더 부가가치가 높은 품목으로 넘어가기 위한 방법을 고심하고 있고요.
많은 지원과 도움으로 버텨 온 센터
센터 인력도 저희가 그나마 구립이고 강동구에서는 시설 규모에서는 가장 큰 보호작업장이다 보니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긴 했어요. 서울시를 통해서 들어오는 정부 보건복지부 비용으로 운영되는 시비 인력과 강동구의 지원을 받는 구비 인력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제가 여기 처음 왔던 2013년만 해도 원장님하고 저, 그리고 구비 인력 한 명밖에 없긴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시비 인력 6명, 구비 인력 3명이 있어요. 회계와 행정을 맡고 계신 운영지원팀 두 분이 계시고, 직업 재활과 발달장애센터 프로그램 운영하는 사업팀으로 나눠서 운영되고 있어요.
작업장에서는 어떤 일을 해도 장애인분들의 힘으로만 다해내기는 쉽지 않거든요. 작업 공정상 기계를 다뤄야 하는 부분도 있고, 숫자를 세는 것이나 작업 완성물을 점검하고 불량을 빼내는 일은 아무래도 보조 선생님들이 맡아주셔야만 해요. 중증인 장애인분들을 위해서는 활동 보조 선생님이 오셔서 조금씩 도와주셔야 하고요. 그리고 코로나 전에는 봉사자가 하루에 10분씩 오시고 그랬어요. 노인 일자리 사업에서 오시는 분이나, 자원봉사센터에서 기업봉사를 유치해주시기도 하고, 지역의 중·고등학생들 봉사활동도 연결해주시고요. 그런 노력 봉사의 도움도 정말 많이 필요해요. 30명씩 한 번에 오셔서 우리 직원분들이 며칠 걸릴 거 한 번에 딱 끝내고 가시기도 하고요. 그렇게 많은 분의 도움을 통해서 센터가 돌아갔던 거죠.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매출을 매년 조금씩 올리고 있었고, 직원분들 급여도 조금씩 올려드리고 있었어요. 하지만 아무래도 빠듯하게 버는 것에 급급하고, 저도 위치가 위치다 보니 처음 이 길에 들어섰을 때 갖고 있던 제 생각이 약간 묻혔었던 것 같아요.
일본에서 만났던 직업의 비전
제가 여기 오기 전에는 세탁 사업을 하는 다른 직업 재활 센터에서 일하는 선생님이었거든요. 온종일 수건 개수 세고, 세탁기 다 돌아간 거 직원분들하고 같이 빼고, 건조기에 넣고 그런 일을 했어요. 그런데 우연히 일본 오사카에서 직조기술을 활용하는 곳에 연결이 돼서 거기 가서 한 달 동안 공부를 하고 오게 되었어요. 당시 원장님이 제가 일본어 전공이기도 하고 손으로 만들고 그러는 거 좋아하니까 가라고 하셨거든요. 처음엔 집안 상황이 좀 그래서 안 간다고 그랬는데, 어찌하다 보니 코 끼어서 이끌려 간 거예요. 처음엔 그냥 거기서 하는 베틀 짜는 거를 배웠어요. 우리나라 베틀을 축소해놓은 거 같은 거로 천을 만들어서 옷이나 가방 같은 걸 만들었어요. 그런데 점차 거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기 시작한 거예요. 제가 뭘 봤냐 하면요. 수업에 와서 배우는 분들이 장애인도 있고, 장애가 없는 분들도 있었어요. 이게 따로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베틀이 쫙 깔려있고, 오면 순서대로 그냥 들어가 앉아 베를 짜는 거예요. 그냥 그 공간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같이 어울려 하는 거죠. 그때 ‘어?’ 싶었어요.
그리고 거기서 나라현에 놀러 가자 해서 따라갔더니 저를 어떤 식당에 데려가셨어요. 녹차 밭 한가운데 덩그러니 있는 레스토랑이었는데 예약을 안 하면 갈 수가 없을 정도인 곳이었어요. 근데 거기선 서빙도 장애인이 하고, 음식을 만드는 곳에는 일반인도 있었지만, 장애인도 같이 있었고요. 그 옆에 빵집도, 지역 공예품 파는 곳에도 다 그 지역 거주 시설의 장애인분들이 하는 거였어요. 그게 직업 재활이었던 거죠. 직접 채소를 기르고 그걸 팔기도 하고요. 그 친구들이 너무 행복하게 ‘야채 사가세요. 빵 사가세요.’ 이야기하는 모습이 참 좋았어요.
그렇게 다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뭐 하고 있나?’ 이런 생각이 정말 많이 들었던 시점이었어요. 그동안 직업 훈련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직업 재활이 어때야 할지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제가 한국에 와서 우리 거주 시설 친구들에게 직조를 가르치기도 하고, 인사동에 쌈지길 같은 곳에 가서도 우리나라의 직조 방식을 배우기도 하고, 그때 공부를 참 많이 한 거 같아요. 그러면서 제가 직업 재활의 길로 완전히 방향을 틀어야겠다는 계기가 되어서 다시 대학에 가서 공부하고, 기회가 닿아 여기에 오게 된 거였어요.
하지만 제가 여기에 중간관리자로 온 거라 제 의지로 되는 게 아니었어요. 시설은 원장님의 의지도 중요하고, 법인의 의지도 강하고, 또 자금도 따라줘야 가능하거든요. 그래서 중간관리자로서는 한계가 엄청 많아요. 그런데 이번에 법인도 바뀌면서 금전적인 부분에서 숨통이 조금 트이고, 변화된 이 공간에서 뭔가를 해볼 수 있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어요. 저는 직업 재활이 좋아서 온 사람이잖아요. 지금도 사실 이 일이 참 좋아요. 내가 즐거워하는 것이 일이고, 일한 것에 대한 대가도 받을 수 있다면 그냥 그걸로 최상의 직업이잖아요. 제 아이도 커서 엄마가 하는 일이 어떤 건지 알게 되면서 사회적 성공을 떠나서 엄마가 이렇게 꾸준히 일하고 자기를 먹여 살린 거에 대해 고맙다며 ‘우리 엄마는 대단한 엄마야.’라고 가끔 얘기하거든요. 그거면 된 거죠. (웃음)
새롭게 준비 중인 프로그램
별별 체육관이 생기면서 체육 활동 프로그램이랑 ‘오카리나’ 수업이랑 ‘옴지랑꼼지락’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어요. ‘옴지랑꼼지락’은 벌써 6년이 다 되어가는데, 손으로 뭘 만드는 프로그램이에요. 우리 직업 재활이 주로 임가공이다 보니 손으로 세밀한 작업을 할 수 있어야 좋은데 이분들이 소근육 운동이 잘 안 돼요. 그래서 핸드메이드 제품을 만들 때 매듭을 짓는다거나 작은 고리에 실을 넣어야 한다든가 하는 손 근육 운동이 되는 프로그램을 해보자 해서 시작했는데, 직원분들이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그리고 전에 ‘클레이 수업’을 해보니 자폐성이 있는 분들이 좋아하시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그런 작업을 많이 해왔던 건지 선생님이 말하지 않아도 자기들이 알아서 만들고 노는 거예요. 그런 거를 보면서 각자의 성향에 맞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사람들은 다 취향이 다르잖아요. 동적인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정적인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우리 직원분들도 마음에 드는 수업에 스티커 붙이라고 하면 딱 나뉘거든요. 이 친구들도 자기 의견이 있어요. 앞으로 두 가지 더 넣을 예정이에요. 기본적으로 한 명당 두 개는 참여할 수 있도록 시간을 할애할 건데, 이게 프로그램을 운영하려면 동아리처럼 소수로 움직여야 해서 프로그램이 여러 가지가 마련되어야 다 참여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가장 걱정인 건 자폐성이 강한 친구들은 자기가 원하는 걸 고르는 의사 표현을 하지 않아서, 이분들에게 뭘 해 줄까 고민을 정말 많이 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중증인 친구들은 같이 할 수 있는 게 잘 없어서 ‘산책 가자’하고 밖에 나가 한 바퀴 돌고 오고, 밭에서 풀 뽑고 그런 수동적인 거밖에 없었어요. 다른 데 물어보니까 몸으로 막 구르면서 노는 ‘신체 놀이’라는 프로그램을 하신다더라고요. 그래서 견학을 하러 좀 가고 싶다고 했더니 자기 노하우라고 오지 말라더라고요! (웃음) 그래도 이제 우리도 별별 체육관이 생겨서 체육 프로그램을 시작한 지 이제 한 2주 차 됐는데, 우리 경욱 선생님이 상태에 따라 1대1로 하시기도 하고 2대1로 진행하시기도 하거든요. 스크린을 보면서 게임처럼 운동을 하기도 하시고요. 그렇게 선생님이 하시는 걸 언뜻언뜻 보면서 저도 그런 거에서 연속성을 갖고 더 할 수 있는 게 뭘까, 정말 중증인 자폐성 친구들과는 뭘 하면 좋을까 계속 고민하고 있어요.
저희가 이렇게 프로그램한다고 하면 많은 분이 첫 번째로 물어보시는 질문이 ‘왜’에요. 보호작업장에서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그렇게 안 해도 보호작업장 운영되는데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거죠. ‘그런다고 월급 달라져?’라고 묻기도 하고요. (웃음) 저희야 직급이 올라간다고 해도 월급이 확 오르고 성과급 같은 것도 없잖아요. 그러니 ‘왜?’가 나올 수밖에 없는 거죠. 보호작업장을 그냥 꾸려가는 것만 해도 힘들기도 하고요.
근데 우리도 직장에 다니지만, 회사만 다니면 재미없잖아요? (웃음) 저는 취미로 퀼트를 해요. 집에 가서 몇 시간씩 퀼트도 하고 뜨개질도 해요. 그게 제 스트레스 해소법이거든요. 아무 생각 안 하고 그것만 하면 성취감도 있고, 저만의 기쁨이 있어요. 그것처럼 우리 직원분들도 뭔가에 열정을 쏟고 거기서 기쁨을 느낄 수 있으면 이 직업 또한 잘할 거라는 거죠. 분명 직업 적응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믿어요.
적성에 맞는 새로운 일자리 발굴
우리 센터에 오시는 분들은 보통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업하시니까 19세부터 많으면 56~57세까지 계세요. 원래 보호작업장은 3년 근무하고 평가해서 외부에 다른 직장으로 내보내는데, 솔직한 말로 사실 갈 데가 많지 않다 보니 계약 연장해서 6년 혹은 그 이상까지 계속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여기에 계신 분들이 장애가 있다고 해서 다 같은 게 아니거든요. 장애의 정도도 다르고, 각자 잘하는 일이 있어요. 어떤 친구가 짐 나르는 일을 잘하면, ‘이걸 체계적으로 할 수 있게 너를 도와줄게’, 어떤 친구가 청소를 잘하면 정수기나 커피 머신 청소 같은 걸 그 친구한테 맡겨요. ‘넌 이것만 항상 청결하게 해’ 그러면 정말 열심히 챙기거든요. 직업교육도 단순히 쇼핑백 만드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도 각자에게 어떤 목표를 주는 거예요.
가끔 외부에서 사회생활을 하다가 적응을 제대로 못 해서 오시는 경우가 있어요. 한 친구는 나사렛대학교도 나왔는데, 완전히 축 처져서 왔어요. 밖에서 너무 치여서 상처만 받고 완전히 주눅이 들어서 온 거죠. 애가 자기 말 한마디를 제대로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들한테 출근하면 저 친구보고 출석부를 싹 부르게 했어요. 앞에 나가서 사람 이름을 부르는 것, 그게 자신감을 주기 위한 시작인 거예요. 그리고 그 친구가 뭐 하나라도 잘하면 그걸 아예 맡기고, 선생님더러 쉬는 시간에 칭찬을 300% 해 주라고 했어요. 몇 달 지나니까 자기 목소리가 약간씩 나오더라고요. 어머니가 애가 친구한테 전화도 걸더라면서 정말 고맙다고 하셨더라고요. 직업 재활이라는 게 사실 이런 거예요. 친구들의 성향에 맞게, 그 사람의 성향을 조금 키워주는 거예요. 잘하는 부분을 키워주면 직업 재활에도 효과가 분명 있거든요.
간혹 일반인과 발달장애의 경계선 급에 있는 친구들은 자기가 여기 있으면 동급으로 생각되는 걸 싫어하기도 해요. 그래서 여기 오기 싫어서 안 오면서 6개월쯤 엄마 속 썩이다가 최근에 돌아온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는 지금 쇼핑백만 만들고 있는데 제가 불러서 “선생님이 네가 쇼핑백 말고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새로운 일을 찾아줄게. 선생님이 약속할게. 올해 안에 안될 수도 있겠지만, 선생님이 너를 위해 무진장 많이 노력해줄게.” 그랬어요. 그래서 ‘꿈드래’라고 암사1동에 저희가 준비 중인 커피숍이 있거든요. 그 친구를 거기 내보내서 훈련하고 있고, 열심히 잘 다니고 있어요. 알아듣는 친구니까 그렇게 희망을 심어줘야 하는 거죠.
변화 과정에서의 고민과 어려움
사실 처음에는 낯설었어요.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와서 뭘 막 하는데 ‘이게 뭐지?’ 싶은 상황이었던 거죠. 솔직히 감이 안 잡혔어요. 전문가들이 오셨으니 공간이야 어떻게든 해 주시겠지만, 이 공간에 뭘 어떻게 담아야 하지? 우리 직원들은 어떡하지? 생각이 너무 많았어요. 게다가 원래 이 공간을 이용하시던 지체 장애 어르신들이 계셨어요. 이 건물 자체가 처음 만들어진 게 지체장애인 쪽 협회랑 이 옆에 있는 강동교회가 함께 구청에 요청해서 설립된 거였거든요. 그래서 이 공간에서 지체장애인 어르신들을 위한 무료급식, 세탁 서비스, 목욕 같은 게 이루어졌었는데, 이번에 이 공간의 운영 주체가 바뀌면서 발달장애인분들에 더 집중하게 되면서 그분들이 누리던 공간과 서비스가 빠지게 되었고, 그래서 그분들의 항의도 있었어요. 그런데 다행히 강동구에 장애인복지관이 새로 생길 예정이라 그쪽으로 안내해드리고 있고, 소통의 장소가 필요하시다면 여기 1층 비버홀에 오시면 제가 커피는 무료로 드린다고 말씀드렸어요. 어르신들을 위한 프로그램 같은 게 필요하시다면 그것도 맞춰드린다고 설득하고 있고요. 그리고 나중에 저희 장애인 근로자분들의 사회 환원 같은 활동으로 어르신들을 위한 세탁 서비스나 도시락 배송 같은 걸 시도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고요. 그렇게 변화 과정에서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대안들을 제시하고 고민해야 했어요.
그리고 저는 기존에 있던 우리 직원들을 안고 가야 하는 입장이잖아요. 그래서 당시에 정말 고민이 많이 됐어요. 이 선생님들을 끌어안고 가야 하는데, 한 분이라도 이탈하면 안 될 텐데 싶었던 거죠. 지금 이 일을 하려고 뽑은 직원들이 아니니 이렇게 바뀌는 상황도 이해시켜야 하고, 새로운 업무에 맞춰 공부도 시켜야 하고 그랬죠. 그래도 다행히 적응을 잘해주고 계세요. 초반의 낯선 상황에 대한 두려움 같은 건 많이 사라졌다고 보이고요. 아무래도 과도기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보니 전부 원점에서 다시 생각하고 업무 분장을 새로 정확하게 나눠야 할 것 같아요. 그래도 벌써 조금씩 자기 일에 대해 약간씩 감을 잡는 게 보여요. 하지만 아무래도 새로운 사업들이 벌어지면서 일이 많아졌어요. 이분들이 녹다운될까 조심스럽죠. 어디 하나 펑크 나지 않게 보면서 균형을 맞춰가며 정착해 나가는 게 지금 중요한 부분인 것 같아요.
공간 배치를 변경하는 걸 논의할 때, 작업장을 3층으로 올리자는 제안에 제가 처음엔 반대했었어요. 기존에 작업장이 1층에 있던 게 다들 부러워하는 부분이었거든요. 1층에 작업공간이 있으면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도 물건들을 옮길 수 있으니 정말 편하거든요. 그리고 작업할 때 기계를 쓰는데 3층으로 가면 그 쿵쿵거리는 울림이 대단할 거 같단 걱정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직원분들이 3층에 있는 게 뭔가 좀 그들을 가둬두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죠. 이런 부정적인 이유가 떠올라서 처음엔 반대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 배치가 좋은 점도 있는 거예요. 예전처럼 사무실이 3층에 있을 때는 외부에서 누가 와도 잘 몰랐어요. 아래에서 얘기가 있어야만 내려갔죠. 그리고 지금 이런 1층 라운지가 없었을 때는 부모님들이 추우나 더우나 밖에서 기다리셨어요. 제가 3층 사무실에 오셔서 기다리라고 해도 미안하다고 안 올라오세요. 그래서 예전에 세탁실 있는 쪽에 머무실 공간을 만들어 드릴까 생각도 정말 많이 했어요.
그래서 새로운 공간 배치의 장단점을 계속 생각해봤어요.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3층이 직원들만의 공간이 되는 거고, 1층 사무실에서 드나드는 분들을 더 잘 볼 수 있고, 더 잘 맞을 수 있는 거더라고요. 그리고 우리도 임가공 사업 외에 다른 사업도 더 알아볼 거니까 물건을 나르는 일도 조금은 줄어들 것 같았고요. 좋은 걸 더 많이 생각하는 쪽으로 가보자 싶어서, 그래서 지금처럼 작업실이 3층에 있고, 2층에 별별 체육관, 그리고 1층에 사무실과 라운지가 있는 이런 공간 배치로 가기로 했어요. 지금 한 달쯤 지내보고 있는데, 이렇게 하길 참 잘한 것 같아요. (웃음)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배가 산으로 간다던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 같다고 혼자 생각했어요. 저희가 말하지 않아도 먼저 발달장애인의 특성을 공부해서 공간 소음도 줄여주시고, 사이니지 같은 것도 제안해주시고요. 한편으론 이렇게 좋게 만들어 주셨는데, 이걸 제대로 잘 사용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더라고요. 이제 저는 앞으로가 더 걱정인 거죠. 잘 써야 한다는 압박이 있어요. (웃음)
이 공간이 어떤 곳이 되길 바라시나요?
저는 앞으로 이 공간이 일종의 ‘문화센터’처럼 이용이 됐으면 좋겠어요. 사실 그런 건 복지관에서 해야 하는 일이긴 하지만 우리 모델이 없던 모델이니까 굳이 예를 들자면 그런 공간이 되면 좋겠어요. 그냥 다들 편하게 들어와서 차도 마시고, 소그룹으로 하는 맞춤형 강좌도 듣고 놀이 공간처럼 어울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인근에 다른 센터에서도 필요하다면 이곳에 오셔서 미팅도 하고, 프로그램도 참여하고 그러는 거죠. 그만큼 비용이나 관리가 필요하겠지만, 어차피 그러라고 만들어진 공간이니까 마치 동네 사랑방처럼 좀 시끌시끌해야지 재미있을 거 같아요. 여기를 오가는 분들이 하루에 100명도 더 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직원분들의 부모님들이 편하게 모여서 담소도 나누고, 모임도 하며 다양하게 활용이 될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겠어요. 그래서 이 공간에서 뭔가 자체적인 활동을 한 번씩 해보시자고 부모회에 제가 제안했어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매실청을 만드신다고 하더라고요. 각자 집에 하나씩 나눠 갖고, 후원자들한테도 팔아보고 그러는 거죠. 그렇게 테마가 있는 부모회를 하면서 서로 친해지고 화합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죠. 저희가 2014년~2015년에는 카네이션을 많이 만들어서 국공립어린이집 같은 곳에 납품하고 그랬거든요. 우리 직원들이 다 못하니까 그럴 때 부모님이 오셔서 다 도우신 거예요. 그런데 그게 끝나고 아쉬우니 냅킨 공예나 해볼까? 해서 그걸 하시고, 팔찌를 만들어볼까? 해서 또 모이시고. 그러면서 한 1~2년 동안 그런 걸 하면서 부모님의 결속력이 강해지더라고요. 그 이후로 좀 뜸하다가 저희가 작년에 ‘힐링할랭’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한 달에 한 번씩 밖으로 나가서 맛있는 거도 먹고 수다도 떨고 그랬거든요. 그렇게 어머니가 행복해야 우리 직원분들도 스트레스를 덜 받고, 어머니들의 결속력이 강해야 우리한테 요구할 수 있는 것도 요구하고 그러시거든요. 부모와 센터 사이의 교류가 정말 중요해요. 부모와 우리의 의견 차이가 별로 없어야 하고, 오해도 없어야 해요. 그래서 저희도 최대한 오픈하고, 무슨 일이 있을 때는 적절한 수준으로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려고 애쓰고 있어요.
이제 다시 생각해보지만, 저도 예전에는 좀 침체 되어 있었던 거 같아요. 아무래도 오랜 기간 똑같은 일을 하다 보면 사람이 슬럼프가 오잖아요. 솔직히 여기 8년 다니면서 저라고 이직 생각을 왜 안 했겠어요. (웃음) 그런데 이번에 법인도 바뀌고 공간도 변하는 모습을 봐가면서 저도 다시 도전하고 싶어진 것 같아요. 예전에 생각했던 잃어버린 꿈 같은 걸 다시 떠올리게 된 거죠. 새로운 뭔가에 도전하게 되는 판을 벌여주신 거잖아요. 이제 저희가 움직여야 하는 거죠. 만들어가야죠. 아마 내년 상반기쯤에는 자리 잡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어요.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긴 하겠지만 조금씩 가고 있으니, 천천히 완성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