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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원 건축가 인터뷰

새로운 목표를 지향하는 프로젝트의 시작
이런 프로젝트가 진행될 거라는 건 베어베터 이진희 대표님을 통해 들어서 한참 전부터 알고는 있었어요. 한국자폐인사랑협회가 수탁 기관으로 선정되고 2020년 3월에 회의를 위해서 처음 이 현장에 왔었어요. 그런데 막상 설계를 시작하게 된 건 가을이 되고부터였어요. 그 사이에는 새롭게 수탁을 맡은 협회와 센터 실무운영진이 같은 비전에 공감해가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설계에 들어가야 했는데, 제가 발달장애인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건 이진희 대표님을 통해 들은 베어베터의 활동 정도였어요. 연계고용이라는 방식으로 발달장애인의 일자리와 새로운 직무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 정도. 그리고 베어베터가 고용노동부 관할의 표준작업장이라면, 이곳은 보건복지부 관할의 보호작업장이어서 일터와 돌봄이 섞여 있는 개념의 장소라는 것만 들어서 알고 있는 정도였죠.
다행인 건, 이 프로젝트 관련된 분들이 모여 있는 협의체가 이미 구성되어 있어서, 제가 모르는 건 의견도 여쭙고 논의도 하고 그럴 분들이 계셨어요. 협의체에는 이 공간을 운영해오신 실무자분들, 한국자폐인사랑협회 분들과 그 산하의 발달장애인 공간을 위탁운영하고 계시는 센터장님들, 그리고 베어베터의 이진희 대표님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어요.
그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가 새롭게 시도하려는 공간의 의미를 조금씩 알게 되었어요. 보호작업장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에게 이 공간에 와서 보내는 시간은 거의 유일한 사회적 활동을 하는, 삶에서 매우 중요한 시간이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 프로젝트가 작업장과 체육관이 공간적으로 합쳐진다는 것을 넘어서 더 큰 의미가 있었던 거죠.
설계를 막 시작하고 성인기 발달장애인들이 사용하는 장소들을 방문리서치 할 때, 단기보호시설 센터봄을 방문했었어요. 류영미원장님께서 해주신 얘기가 기억에 많이 남아요. 센터봄은 별로 크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시설이 좀 크면 좋지 않겠냐고, 규모있는 시설들이 더 필요하지 않냐고 여쭤봤는데, 당신은 오히려 작은 시설들이 더 좋다는 거예요. 작은 시설들이 도시에 많이 흩뿌려져 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공간이 크고 설치밀도가 낮으면 사용자 거주지에서의 접근성이 떨어질 수 있고, 인근 지역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저항이 커질 수 있다고요. 그리고 발달장애인들이 한 공간에만 오래 머물기보다, 여러 곳을 다니며 도시와 만나는 동선이 생기는 게 더 좋다는 거죠. 그래야 그들의 존재도 더 드러나고, 사회와 공존하기에 더 적절하다고요. 그래서 원장님은 센터 주변 가게들을 돌며 센터봄 이용자분들이 방문하면 이웃으로 친절하게 맞아달라고 부탁도 하신다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우리가 만드는 이 공간에서만큼은 발달장애인분들이 주인이 되는 곳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래도 발달장애인분들은 환경에 굉장히 민감하고 사회적인 소통을 어려워하는 분들이다 보니 비장애인분들이랑 공간을 나눠 쓰기가 쉽지 않은 조건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그분들이 ‘내가 주인이야’라고 느끼며 쓸 수 있는 공간은 드물겠더라고요. 그래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발달장애인분들이 자기가 주인으로서 손님을 초대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만들자는 목표를 세웠어요.
'질문지를 건네는' 건축가의 역할
프로젝트 초반에는 논의에 참여하시는 협의체에서 공간이 어떻게 바뀌고 그 변화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를 상상하기에 어려움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그동안은 리노베이션이라고 하면 환경개선 정도의 일이라고 생각해오셨을 것이니까요. 각각이 갖는 기대치도 다 달랐을 거구요. 협의체와 함께 공감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했지요. 해답을 바로 내는 것이 아니라 ‘일과 삶의 균형을 이루는 공간’이라는 목표를 어떻게 구현하냐는 질문을 구체적으로 세분화해서 만드는 것을 함께 하는 거죠.
일테면, 조닝(Zoning)에 해당하는 층별 배치, 평면 계획이 달라지면 공간의 지향점이나 정체성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자세히 설명드렸고, 그러면 그 결정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를 다 함께 이해하고 의사 결정을 하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했어요. 협의체 단체채팅방에 17명까지 들어와 있었는데, 의사 결정에 참여하신 분들이 우리가 어떤 결정을 하고 있구나라는 걸 같이 학습하는 과정이기도 했어요. 그 부분이 굉장히 중요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만들려는 건 기존 모델이 없고, 신념을 갖고 하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해서 서로서로 영감을 줘야 하거든요. 운영하실 분의 지향과 계획을 묻고 또 물어서 공간계획에 반영하려하고, 계획안으로 공간을 상상함으로써 이런 운영이 가능하겠구나 생각하실 수 있게 되어야 하는 거죠. 결정 과정에서 그런 마음가짐을 서로 다져갈 수 있었던 거예요. 실제로 계획의 의사 결정 과정을 함께 겪으면서 ‘말로만 하는 게 아니고 정말로 만들어지고 있구나!’라는 걸 인지하고 확신하게 되는 과정이죠. 공간계획과 운영계획이 의사결정을 함께 해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저는 질문지를 드리는 역할을 했던 것 같아요. 저희 제안이 해답이라고 제시하기 보다는 제가 드리는 A안이나 B안이 각각 어떤 의사 결정인지를 번역해 설명 드리고 어느 방향의 의사결정이 하고 싶으신지 여쭤보는 식이지요. 그러면 다들 굉장히 진지하게 고민해주셨거든요. 그리고 다시 그 안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운영상, 안전상 문제가 될 수 있는 지점들을 논의하다보면, 그건 또 다른 질문지가 되었던 거죠. 저도 그런 피드백이 필요했기때문에 그렇게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과정이 지난하거나 힘들지 않았어요. 공통의 지향점을 가지고 계속 열어놓고 되묻는 과정을 통해서, 함께 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많이 배웠다고 생각해요.
최근에 했던 프로젝트들을 돌아보면 시작할 때 요구사항이나 지침이 명확하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었어요. 건축주도 본인이 뭘 원하는지 정확하게 제시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확실한 과거를 답습하지 않고 불확실하더라도 미래의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이에요. 그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질문을 만드는 것 부터가 건축가의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지는 사실 꽤 됐죠. 좋은 질문을 찾는 것이 설계의 시작이고, 좋은 질문으로 구성된 지침을 만들고 그 답을 찾는 것이 계획이 될 때 좋은 프로젝트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요. 다른 사무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는 주어진 숙제를 혼자 풀기보다는 함께 풀자고 해요.
건축 설계 첫번째 회의에서 공일스튜디오가 발표한 자료 링크 '공간배치의 지표'를 제시하고 그에 따라 공간 성격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수직공간 시나리오'로 정리하여 설명하였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공간의 요소
‘발달장애인을 위한 공간’이라는 게 잘못하면 그냥 수사처럼 쓰일 수 있잖아요. 그러지 않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계획하는 게 발달장애인을 위한 공간계획인가, 많은 자료를 찾아봤어요. 외국에 유사한 프로젝트나 연구논문 같은 걸 많이 찾아봤어요. 요즘엔 검색해서 찾을 수 있는 자료들이 꽤 많으니까 그런 걸 찾아서 협업한 이현진 소장이랑 원문 번역해가면서 자료를 만들어 공부했고요.
그리고 발달장애인이 사용하는 시설들을 방문해서 공간계획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이 있을지를 여쭤봤어요. 협의체 단체대화방에 한국자폐인사랑협회 산하의 시설의 센터장님들이 참가하고 계셨는데,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직업재능개발센터, 단기보호센터 센터 봄,별별생활체육센터 본점, 베어베터에 방문해서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공간계획에 고려해야할 특이점이 있을지 관찰하고, 궁금한 점을 묻고 학습했어요. 이현진 소장이 강동그린나래센터 보호작업장의 일하시는 공정과 공간을 관찰하고 정리하기도 했고요. 자료와 방문리서치를 종합해서 발달장애인의 공간을 어떤 관점과 지표를 가지고 설계를 해야하는 지에 대한 나름의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것 부터를 계획의 시작점으로 삼았어요. 그런 다음에 제안에 들어간거죠.
누가 그런 얘기를 해주시더라고요. ‘당신이 발달장애인 한 사람을 만났다면, 그건 그 한 사람을 만난거다. 발달장애인을 만났다’고 일반화할 수 없다.’ 그만큼 그들이 다양하고 스펙트럼이 광대하다는 얘기인 거예요. 다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들인 거죠. 그럼에도 이분들의 공통적인 인지 특성에 관해 연구된 것들이 있었는데, 중요한 건 이분들의 감각이 굉장히 민감하다는 거예요. 소리나 빛 같은 것에 매우 예민하고, 너무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들어오면 당황하거나 힘들 수 있는 거죠. 익숙한 루틴에서 벗어난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대응하기가 어렵구요.
이를테면 전체 공간이 한눈에 들어오는 오픈 랜드스케이프 형식의 공간이라면 한 번에 들어오는 정보가 너무 많아서 힘들겠지요. 그래서 저희가 제안한 공간은 오픈된 공간일지라도 단계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마감재의 구분이나 투과성 루버벽을 사용하는 등으로 방처럼 느껴지는 영역단위로 분리했어요. 개방감이 필요한 일층 비버홀은 마감재를 같은 나무 소재로 해서 구분된 한 공간으로 인지할 수 있기를 바랐어요. 감각적으로 편안한 환경조성을 위해, 조명도 보통 업무시설 5000~6000K 의 조도에 대해, 저희는 시각적 자극을 줄이기 위해 4000K로 계획했어요. 마감톤과 공간의 색상도 최대한 중성적이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컬러를 사용했어요. 체육관 같은 곳만 포인트가 조금 있는 정도죠. 원래는 지금 계획보다 조금 더 컬러를 사용해서 활력을 주는 계획도 세웠었는데, 박초롱 디자이너, 박병준 디자이너가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맡으시면서 캐릭터나 사이니지가 들어와 적정한 자극이 될 것으로 예상되어 공간은 배경으로서 안정감을 주는 방향으로 가자고 논의를 통해 시공된 안으로 정리된 거예요.
마감재로 구분되는 공간 영역
그리고 여기는 보호작업장이다 보니, 일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또한 돌봄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에요. ‘안전’이라는 차원에서 관리하시는 분들이 늘 항상 같이 계셔야 하는 공간이죠. 완전히 고립 되거나 안 보이는 코너가 있으면 위험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 무슨 감시 타워처럼 모든 곳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래선 또 안되쟎아요. 안전이 보장되면서도 프라이버시가 있는 공간이 만들어져야 하는 거죠. 적정하게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단위로 공간이 나뉘어 있되, 동시에 관리자 분들이 어디에 누가 있는지 정도는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각적 개방성이 유지되는 게 중요한 부분이었어요. 발달장애인 근로자분들과 비장애인인 관리운영하는 분들, 방문자들 모두 이 공간의 구성원으로 공존에 필요한 것들을 공간에 반영하려 했는데요. 다만, 자기 목소리로 주장을 펼칠 수 없는 분들의 필요를 좀 더 적극적으로 유추하고 반영하려고 노력했어요.
공간이 명확히 구분되면서도, 시청각적 소통을 위한 연결도 중요하였다.
발달장애인분들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거니 사원들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계속 했지만,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첫 단계부터 물어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프로젝트에서도 마찬가지인데요. 공간계획에 반영될 만한 의미있는 질문을 하려면 사용자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이해를 바탕으로 어떤 필요가 있을지 공부가 먼저 필요한 것 같아요. 이번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사원들의 의견을 묻고 듣고 반영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적절한 시점을 찾지 못한 채로 계획이 마무리되고 공사가 시작되었어요. 그런데,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과정에서 사이니지계획을 위한 실이름의 결정에 발달장애인 사원들이 참여하고, 그 결과를 반영할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실이름들에 회의실, 다목적실 혹은 배움실 같은 이름들이 붙었을 거에요. 보통 사용자에게 동의하냐고 묻지않은 채 정해지는 이름들이지요. ‘사용자 중심의 공간’에 이르는 여러 가지 길이 있는 것 같아요. 가능한한 묻고 답하는 과정을 열어두는 것이 곧 사용자에게 맞춤인 공간을 만드는 과정이겠다 싶어요. 이번엔 실이름 정하기 였던 거죠.
한편으로 발달장애인에게 100프로 맞춤인 공간이 발달장애인을 위한 공간인가 하는 것은 어쩌면 한 단계 더 나아간 고민일 텐데요. 내부에 천국 같은 공간을 만들어놔도 문밖으로 나가면 도시가 있죠. 이 사회에서 공존하기 위해 공존의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것도 여전히 이들에게 필요한 거예요. 그 부분이 발달장애인들을 위한 건축공간을 연구하거나 실행하시는 분들 공통의 이슈이자 생각거리 중 하나더라고요.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이 프로젝트의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한 건 기록이 새로운 기획으로 연결되는 실험을 해보고 싶어서에요. 저는 기록이 ‘과거형’의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한 시작점, 기반을 만들어 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많은 분들과 여기까지 온 건 굉장히 많은 성취를 한 건데, 그걸 기록해두는 이 점 하나가 없으면 지금까지 오며 배운 것, 느낀 것, 성취한 많은 것들이 흐지부지될 수 있어요. 그리고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분들한테 이 과정이 어땠냐고 물어보고 기록하는 것 자체로 앞으로 운영하실 분들에게 계획을 선언하고 포부를 밝히는 자리로서 큰 동력을 주는 일이 된다고 생각해요. 이제부터 만들어질 이 공간의 서사는 결국 그분들이 만들어 가게 될 거니까요. 시간이 흐르면 운영진도 바뀌고 운영 방식도 달라질 텐데, 새로 오시는 분들께 이 공간이 무엇을 목표로 어떻게 만들어진 공간인지, 어디서부터 스스로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면 될 지 그 지점을 짚어주는 것도 이 기록의 역할이 될 거예요. 공동의 노력으로 계속해서 더 나아갈 수 있는 징검다리의 첫 돌을 만들어 두고 있는 거죠.
아직 확실치 않지만 이번 프로젝트 이후에도 이러한 공간이 더 늘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고 있어요. 한 번의 실험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자리를 잡으려면, 단순히 공간의 물리적 스펙을 옮겨 심는게 아니라 여기 담긴 가치와 규범이 같이 자리 잡아야 할 거에요. 어떤 가치있는 지점을 발견하고, 그걸 건축 안팎에서 함께 공유하고 상상하고 공감해야 정말 좋은 건축이 지어져요. 정말 좋은 건축은 사회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구요. 이번 프로젝트가 단순히 3층 규모의 건물을 리노베이션 하는 프로젝트였을 수 있는데, 저에게는 이전에는 잘 몰랐던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하는 새로운 지향점에 대해서도 인지할 수 있었고, 그 방향으로 변화를 심는 건축의 실험을 해볼 수 있었던 프로젝트여서 특별했어요. 기록이 끝이 아니고 시작이 되길 바라요.